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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산 예술 정보 채널 - 동서 로마의 분열과 비잔틴 제국 탄생

by kaessan 2020.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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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캐산 예술 정보 공유 채널입니다. 오늘은 비잔틴 문화와 예술 - 동서 로마의 분열과 비잔틴 제국 탄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비잔틴 문화와 예술 - 동서 로마의 분열과 비잔틴 제국 탄생

비잔틴 문화와 예술 - 동서 로마의 분열과 비잔틴 제국 탄생 

고대 로마라는 국가는 한 명의 황제가 다스리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넓어지게 됩니다. 로마가 지나치게 커지면서 여러 가지 정치체제의 실험이 일어나고, 그중에 하나가 두 명의 황제가 국가를 다스리면서 그 밑에 두 명의 부황제가 생겨서 네 명의 황제가 각각의 제국을 나눠서 다스리는 형태의 실험이 있었습니다. 두 명의 황제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권력 다툼이 발생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맞붙으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승리하면서 밀라노 칙령을 내리면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됩니다. 제국이 커지고, 정복전쟁의 와중에 제국의 동쪽 경계선 너머로 페르시아라는 강력한 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 곳을 막을 군사적 거점 도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군사적 거점도시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개척한 항구 도시 비잔티 온을 선택하게 됩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끝에 있으며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한 면에 성벽을 쌓으면 외적의 칩입을 막기에 천혜의 도시였습니다. 이 해상 무역의 거점에 성벽을 쌓아 자신이 만든 도시라는 뜻으로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옛 로마의 모습을 많이 옮겨서 전차경기장, 원로원 등을 그대로 옮겨놓은 형태로 건설했습니다. 기존 특권계층이 없었고 주로 상인 계층이 거주하게 되면서 젊은 인재들이 속속히 모여들어 발전하게 됩니다. 독실한 기독교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또한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일설에 따르면 헬레나가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가 아기 예수가 누웠던 구유와 십자가 조각을 발견하고 그 성유물을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성유물이 기적을 행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성유물에 대한 집착이 상당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로마 등의 도시에서 성유물을 보관하기 위한 성당이 상당히 많이 건설되어 있습니다. 성유물은 새로운 성당을 세우는데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나기 위해서는 유럽에서 보스 프로스 해협을 거쳐서 오늘날의 중동 지역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은 꼭 들러야 하는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콘스탄티노플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져갔고 동방 정교라고 불리는 그리스 정교에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헬레나 모후를 중요한 성인으로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고대 로마의 본거지는 점점 더 약화됩니다. 서기 476년 고대 로마의 비 로마계 세력(고트족, 훈족, 반달족 등) 게르만 세력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이때는 콘스탄티노플을 거점으로 한 동로마 제국과 두 개의 제국으로 나뉜 시점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지배권은 게르만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가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 문화의 잔존 세력들은 또 하나의 로마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서구 기독교 세력의 생각과는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동로마 제국은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왕권이 미약했던 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왕보다 우위에 교황이 있었던 체계였지만 동로마 제국은 황제가 교회보다 우위에 있었고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뭉쳐 저 한 사람의 황제를 모시는 모양이었습니다. 서쪽으로는 유럽과 동쪽으로는 아시아가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약화되면 침략당하기 쉬운 구조였기 때문에 정교합일 주의를 채택했던 것입니다. 7세기 이후, 서기 632년에 이슬람을 창시한 시조 마호메트가 사망한 이후로 동방의 이슬람 세력이 끈질기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의 공격을 800년 이상 받아왔고, 마침내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것도 이슬람의 세력인 오스만 투루크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군사적 요충지로서 콘스탄티노플의 중요성


콘스탄티노플의 서쪽면은 3중의 성벽으로 쌓여있었기 때문에 이슬람 세력은 바다를 통해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잔틴 제국의 군대는 아직까지 제조법이 비밀에 쌓여있는 액체 화약인 '그리스의 불'이라는 무기로 이슬람 아랍 세력을 물리쳤습니다. 이때까지는 대포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의 불은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무적의 무기였습니다. 비잔틴 제국은 이러한 군사적 위력과 천혜의 지리적 장점을 활용해서 천 년이 넘는 시간동안 제국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불 이야기는 서양의 많은 신비주의 문헌에 등장하기도 하고 이 내용을 다룬 다양한 소설도 등장했는데 아직도 제작 방법과 발사 매커니즘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방 세계에서는 늘 콘스탄티노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고, 사절을 보낼 때마다 세 가지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불, 황제의 보물,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 황제의 황녀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주색이 가장 성스러운 색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줏빛 제의는 황제와 황후만이 입을 수 있었고 그들의 적자들은 궁전의 자줏빛 방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비잔틴 제국을 공격했던 이슬람은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유럽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대신 밑으로 돌아가 모로코에서 배를 타고 북아프리카를 통해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해 이 곳을 이슬람이 지배하게 됩니다. 스페인 그라나다, 말라가, 코르도바 같은 곳에 독특한 이슬람 건축들이 많이 남아있는 이유이며 서기 711년부터 서기 1492년까지 이슬람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는 동안 지어진 것입니다. 마침내 1204년에 4차 십자군에 의해서 콘스탄티노플은 점령되게 됩니다. 이때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 라틴왕국을 세워서 60년 정도 존속하다가 다시 콘스탄티노플인 동로마 세력에 의해서 탈환되고 맙니다. 이때 동로마 제국이 큰 타격을 입고 점차 쇠락하다가 1453년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으로 무너지면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 당시 콘스탄티노플이 보유하고 있었던 부와 예술적 수준이 뛰어나 유럽과 이슬람에서 지속적인 공격을 해왔던 것이었습니다. 국가가 점점 쇠락하면서 비잔틴의 보물, 성화, 공예품, 금속과 상아공예, 의복, 예식 등이 서방의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모로 우월했던 비잔틴 제국의 문명을 서방 세계에서 탐내고 약탈하면서 그 기술을 모방해 자신들의 공예와 회화 기술을 발전시켜서 오늘날 르네상스를 불러오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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